단위 | 김일성 연대 X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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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19 |
[1919] 팔도구 소학교에 입학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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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23 |
[1923.03] 외척이 교사로 있는 칠골의 창덕소학교로 전학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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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25 |
[1925] 만주 푸쑹 소학교로 전학, 졸업, 길림성 유원중학교로 진학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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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26 |
[1926.06.05] 아버지 김형직 사망.
[1926.10.17] 공산주의 소년단체 ㅌ.ㄷ(타도제국주의동맹)의 조직에 가담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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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29 |
[1929] 유원중학교 3학년 재학 중, 불순사상 혐의로 중국 군벌에 체포
[1929] 가을, 수감 중 유원중학교에서 퇴학당함, 화성의숙에 입학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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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30 |
[1930.05] 초 출옥
[1930.06.30] 카룬회의를 주관하고 조선혁명군을 조직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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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31 |
[1931] 화성의숙 졸업, 조선공산청년회에 가입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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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32 |
[1932.04.25]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직, 그 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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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34 |
[1934] 가을 동북인민혁명군 제3단으로 배속되어 동북인민혁명군 제3단 정치위원에 임명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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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36 |
[1936] 함경남도에서 보천보 전투를 지휘, 일본군과 경찰관서를 습격.
[1936.03]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정치위원회 위원
[1936.05] 항일 통합조직 조국광복회 결성에 참여
[1936.07] 동북항일연군이 편제개편 이후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으로 배속, 제1로군 6사단장이 되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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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40 |
[1940] 소비에트 연방 하바로프스크로 떠나 소련군에 입대, 소련군 특무공작요원으로 훈련을 받고 소련군 장교로 임관(소련 인민군 육군 소위)
[1940.03.25] 허룽현 훙치허에서 훙치허 전투를 지휘. 일본인 백여 명을 사살하고, 30여 명을 생포했으며, 탄약과 양곡을 전리품으로 획득하였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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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45 |
[1945.08] 초 동북항일연군교도려 내에 있던 조선인들은 '조선공작단' 결성에 참여
[1945.08] 말 소련군 소좌로 진급, 귀국
[1945.09.22] 평양에 도착
[1945.10] 소련군 소좌에서 예편
[1945.10.08] 10월 9일 김일성은 38도선 개성에서 박헌영과 회담하여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를 협의하였다. 그러나 38도선 이북에도 당본부를 설치한다는 그의 주장에 박헌영은 거절하고 분국 형식으로 당을 조직하게 됐다.
[1945.10.10]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중앙조직위원회를 조직
[1945.10.13]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조직, 조공 북조선분국 집행위원에 선출(당수는 김용범)
[1945.11]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장악, 12월 김용범을 몰아내고 책임비서가 되다.
[1945.12.18]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제2대 책임비서로 선출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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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46 |
[1946.02.08]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위원장
[1946.02.15] 민족주의민주전선 북조선지부 위원장
[1946.03]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북조선공산당으로 개명하고 당수에 취임. 3월말 북조선공산당을 다시 북조선로동당으로 당명을 바꿈
[1946.03.01] 평양에서 3·1절 27돐 기념회를 주관하다가 백의사 단원이 던진 폭탄을 피해 단상에서 뛰어 내림. 이때 그를 감싼 소련군 중위 노비첸코는 오른 팔을 잃었다.
[1946.06.14] 민주주의민족전선 북조선지부 산하정당 소집, 임시정부 수립 계획을 논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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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48 |
[1948.02.08] 조선인민군 창건, 최고인민회의 조직, 대의원의 한사람에 선출됨
[1948.03] 김구의 남북협상 제안에 수용
[1948.04] 평양직할시에서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를 주관
[1948.09] 황해남도 해주군에서 제2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를 주관
[1948.09.09]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초대 총리에 선출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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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49 |
[1949.06.30] 통합 조선로동당 위원장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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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50 |
[1950.06.25] 한국 전쟁 발발
[1950.07]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취임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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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53 |
[1953] 박헌영을 실각, 남로당 출신들을 처형함
[1953.02.08] 인민군 창건 5주년에 공화국 최초의 조선인민군 원수로 추대
[1953.07.28]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훈장 제1급
[1953.07.28]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'공화국 영웅' 칭호 수여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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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56 |
[1956.07.19] 박헌영을 처형함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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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58 |
[1958.03] 무력으로 최고인민회의 장악,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을 강제 해임, 실각시킴
[1958.11] 김원봉을 숙청, 처형함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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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60 |
[1960.03] 마산에서의 시위를 보고 이승만의 퇴진을 예견함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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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70 |
[1970] 조선로동당 제5차 전당대회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에 재선출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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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72 |
[1972] 남북고위급회담을 박정희에게 제안, 사절단 교환후 7·4 남북 공동 성명 발표
[1972.05] 자주, 평화,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원칙 발표
[1972.10] 국가 주석 취임, 동시에 국방위원회 초대 위원장에 선출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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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80 |
[1980.10]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로 다시 재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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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89 |
[1989.01.01] 신년사에서 남북정치협상을 제의, 남쪽의 각 정당 당수와 사회단체 대표, 추기경 김수환, 민중·노동운동가 백기완, 목사 문익환 등을 평양으로 초청
[1989.03.25] 목사 문익환이 방북, 그와 두 차례 회담을 하고 4월 10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.
[1989.06.21] 한국외국어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임수경이 일본 도쿄를 거쳐서 방북, 면담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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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90 |
[1990.05.24] 최고인민회의로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주석에 재선출되고, 국방위원회로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에도 재추대되었다. 동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수위(首位)에 추대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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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92 |
[1992.04.13] 조선인민군 대원수로 진급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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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93 |
[1993.02] 대한민국 대통령 김영삼에게 방북을 제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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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94 |
[1994.07] 초 묘향산으로 휴양을 다녀왔다.
[1994.07.08] 사망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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